성경적 삶을 살도록 돕는 QT(경건의 시간) 체험학습 과정으로 이 기간 동안 성경을 삶 속에 적용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실제적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으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훈련하며, 적용하는 과정입니다.
할렐루야! 지난 한 주간도 평안하셨습니까? 날씨가 무척 덥고 가물었었는데, 어제 단비가 내려 너무 감사하고 시원했죠? 여러분, 이 시간도 성령께서 여러분의 영혼에 단비를 내려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지난 주일은 맥추감사주일로 섬기면서, 반년의 감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해 드렸습니다.
맥추감사절이라는 것은, 한 해의 중간에 지키는 절기이기에 그야말로 반년의 감사를 드리는 절기라고 말씀드렸는데, 우리는 이 절기를 통하여, 올 한해도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을 감사하며, 그러나 앞으로도 도우실 하나님을 믿고 감사,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의 영적건강을 위해 항상 소소한 일까지도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난 한 주간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셨습니까?
성도 여러분, 보고, 듣고, 말하는 것에 3중장애를 가졌던 헬렌켈러는 그의 상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가진 바 때문에 우리가 감사하는 것이 아니요, 우리의 되어진 바로 인해 감사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것은 또 다시 받을 길을 열어 놓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현재 어떻게 되어졌든지, 하나님께 감사할 수 만 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또 다시 더 좋은 것으로 여러분에게 돌려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든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만 소망하며 감사할 수 있는 삶은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불합리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의인이 복을 받고, 악인이 벌을 받아야만 하는 것 같은데도, 의인이 벌을 받고, 악인이 복을 받는 것과 같은 상황이 펼쳐질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성경적으로 보아도 마땅히 잘 되어야 할 사람이 잘 못되고, 잘 못되어야 할 사람이 잘 되는 경우가 얼마나 흔하게 우리 삶에 나타나고 있습니까?
사실 우리 삶의 실망감이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우리가 무엇인가를 잘못해서 받는, 좋지 않은 응당한 대가는 대체로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실망감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정말 성심성의껏 열심히 했는데도, 그에 합당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그럼에도 옆의 불성실하고, 불의한 사람은 더 승승장구할 때, 정말 삶의 의욕을 잃고 실의에 빠지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갑작스레이 재산도, 자녀도, 다 잃는 엄청난 환난을 당한 욥이,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놀라운 고백을 하고도, 그렇게나 실망을 하며 오히려 오랜 동안 깊은 실의에 빠졌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욥기 6장 9절로 10절에서 그는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그 손을 들어 나를 끊으실 것이라. 그러할찌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무정한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할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은 그렇게나 말씀을 한번도 거역지 않았던 욥을 멸하시기를 기뻐하셨지만, 그러나 욥은 오히려 그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고백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정말 욥이 기뻐서 이런 고백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이토록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적이 없었는데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고난을 주신다고 생각하니까, 그것이 너무나도 실망스러웠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환난과 불합리한 현실이 하루도 그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삶 속에서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현재 어려움을 당하고 있고, 아직도 그 지독한 가난 가운데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아니면 밑도 끝도 없이 내려가거나 또는 제자리걸음만 계속하고 있는데, 과연 나는 무엇을 소망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도 욥과 같이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못하더라도, 그처럼 원망하는 것과 같은 말들을 쏟아내며 현실의 불합리에 대해 하나님께 항의하며 힘든 삶을 살아야겠습니까?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에 오늘 본문은 해답을 가르쳐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같이 다시 본문 15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내가 희락을 칭찬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해 아래서 나은 것이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으로 해 아래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중에 이것이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니라.”
그 해답이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그 어려운 삶 가운데서도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모습은 희락이라는 것입니다. 희락이 뭡니까? 기쁨인 것입니다.
어떤 불합리한 환경 속에서도, 여전히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가장 축복된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저는 오늘 몇 가지로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도 여러분, 7월은 희락의 달입니다. 바라옵기는 이번 달을 통하여, 특별히 강단에서 주어지는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의 잃어버린 기쁨이 다 다시 회복되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세상 끝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고,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그 심판은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는다고 했습니다.
누구나 세상 끝에는 죽어서 예수를 만나든, 살아서 예수를 만나든,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되어 있는데, 그 기준은 그의 몸으로 행한, 선과 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 데, 어떻게 그 모든 것을 우리 주님이 다 알아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계시록 20장 12절은,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행위는 다 생명책에 전부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도 빠짐없이 다 다 선악간에 심판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한 말 한마디, 한순간의 생각, 행동 하나라도 다 심판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이 땅에서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 더 무섭습니까? 아니면, 이 땅에서 잘되고 성공하더라도 죽어서 심판을 받아 지옥 가는 것이 더 무섭겠습니까?
사실 이 땅에서 아무리 잘되고 성공하더라도, 죽어서 지옥간다면, 그보다 더 무서운 사실은 없는 것이죠?
그러나 요한복음 3장 18절은 뭐라고 했습니까?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를 믿기만 한다면, 반드시 심판을 면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빌리선데이 목사님은, “절뚝거리며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온전한 발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보다 낫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이 하나님의 은혜로 부귀영화를 누리든, 혹은 그렇지 못하여 가난에 찌들어 살든, 인생을 짧게만 보지 말고 좀 길게 봐서, 이 땅에서는 좀 힘든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저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실망치 말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의 가장 큰 축복과 영광은, 부귀영화가 아니라, 분명 저 영원한 천국인 줄 믿습니다.
그런데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꿈에 죽어서 천국엘 갔는데, ‘당신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라는 판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천국에 들어가는데, 때마침 세상에서 총알택시운전을 하던 기사도 택시를 총알처럼 빨리 몰다가 죽어서 천국에 들어오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마중 나오더니, ‘목사님은 저쪽 지옥으로 가시고, 총알택시기사는 이쪽, 천국으로 가십시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깜짝 놀라서는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는 목사였고, 저 사람은 법을 어기면서 운전하던 총알택시기사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는 지옥이고, 저 사람은 천국입니까?’
그랬더니 베드로는 그래도 ‘목사님은 지옥, 총알택시기사는 천국’ ‘분명히 이것이 맞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해가 안 되서 왜 그런 것이냐고 다시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설교를 시작했다면 사람들을 잠재워버렸지만, 저 총알택시기사는 오히려 사람들을 깨워 하나님께 기도를 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잖아요? 사람들이 총알택시를 타기만 했다하면, 어떻게 합니까? 너무 빨라서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아이고 하나님 나 좀 살려주세요.’ 기도하죠?^^
누가 웃으라고 만든 예화죠? 그러나 여기 어떤 교훈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이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맡겨준 사명을 잘 감당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왜 그렇겠습니까?
물론 여기 예화에서 잘못된 것은, 천국이 마치 무슨 자기공로로 가는 것처럼 표현된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은 예수만 잘 믿으면 가는 줄 믿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영생의 삶속에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하늘나라 상급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상급은 어떻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5장 11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오히려 사명 감당을 위해, 불이익을 당하고 희생을 당하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는 실망할지 몰라도, 분명 저 하늘나라에서는 더 큰 상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 예수 때문에 다른 성도보다 더 힘들게 살고, 그래서 남을 위해 사느라 더 부족하게 살고, 어려운 중에도 믿음 지키느라 더 힘들게 살고, 더 핍박을 받으며 사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더 큰 상으로 기뻐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이 ‘예수 바로 믿는 것’ 때문에, 이 땅에서 힘들고 어렵다면, 오히려 저 하늘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며 더 기뻐하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남보다 충성하고 믿음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데도, 이 땅에서 복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저 하늘나라에서 더 큰 상으로 보상받게 될 줄 믿습니다. 반드시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미리 보면서 감사하시라는 것입니다. 복음성가에도 있죠?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 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보면서 감사하세요.”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이, 항상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을 바라봄으로 언제나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어떤 의미에서 빈곤이나 고통이나 연약함과 같은 것은 악의 표시가 아니라, 선의 표징으로 인정될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눅6:20)
누가복음 6장 20절을 보면, 오히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또 잠언 16장 8절은,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의롭게 살려고 하다보면, 오히려 가난해질 수가 있다는 것인데, 오히려 그것이 축복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축복 때문에, 도리어 큰 부자가 되기보다는 소득이 적은 가난한 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하다고 실망하지 말고, 24장 19절의 말씀처럼,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심지어는 ‘그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라’고까지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잘사는 사람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잘 믿는 사람을 부러워해야 할 줄 믿습니다.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예수를 잘 믿을까?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라, 비록 실패한 것 같고, 그래서 어렵고 힘든 삶을 살더라도, 그 가운데서, 실망치 않고 믿음을 잘 지키며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믿음의 사람들을 오히려 부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분들이 계십니까? 저는 계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시간 여러분 모두가 이런 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신앙생활을 잘 했던 저 2천년전 초대교회 성도들은 얼마나 부자였습니까?
그들이 로마의 박해를 받기 시작하면서는, 자신들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지하동굴 카르타쿰에 들어가 평생을 살고도, 그 삶을 대를 물려주어야 할 만큼이나 가난하고도 비참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의 삶이 진정 실패하고 저주받은 삶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여러분이 하나님을 잘 섬김으로 인하여 가난하고 헐벗은 삶을 산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 실망하기만 해야 할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가난한 삶의 겉모습만을 가지고는 결코 우리의 축복을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려고 하다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더 가치 있는 선의 표징이요, 축복의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무엇이 많이 없다하더라도, 우리 주님과 함께 하기만 한다면, 그 분 한분만으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이자, 목회자였던 마빈 목사님이 젊은 시절 전쟁으로 인하여 가족과 집을 떠나 캔사스의 황야를 홀로 헤매고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어느 한 여인의 찬송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길 되나니 은혜로다 천사 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그래서 그 찬송소리에 이끌려 가다보니까, 그 소리는 말로 형언할 수 없이 낡고도 초라한 집에서 나오는 소리였다는 것입니다.
다 낡은 옷을 입은 한 여인이 그 초라한 뜰에 앉아 무슨 일을 하면서 찬송을 부르고 있었는데, 그 얼굴이 어찌나 행복에 젖어 은혜의 빛을 발하고 있었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어렵고 힘든 형편 가운데서도 주님을 생각하고, 저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상급을 생각하다보니까, 지금 형편은 힘들고 어려웠어도, 늘 소망 가운데 행복에 젖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 젊은 마틴은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로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오! 나의 하나님! 저도 주께로 가까이 가기를 원합니다. 저를 주께로 가까이 이끌어주시옵소서!”
성도 여러분, 힘들고 어렵습니까? 이 시간 여러분에게 주께로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시길 축복합니다.
여러분이 주께로 더 가까이 가기만 하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 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만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기쁨이 회복될 줄 믿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만족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는 마음 자체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희락자체가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이 어떠하든, 먼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의 말씀처럼, 항상 기뻐하며 희락을 추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토마스 랭포드는 예수님이 말한 축복은 행복이 아니다. 행복은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미를 나타내기에 너무 부족하다. 그러면 무엇인가? 아마 기쁨이 오히려 더 적당한 단어가 아니겠는가? 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기쁨이 행복보다도 더 큰, 가장 큰 축복이 되겠습니까?
기쁨은 행복보다도 더 깊은 곳에서 그러나 가장 궁극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총의 열매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환경이 갖추어졌다고만 해서 행복하다는 말을 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물질을 가졌다해도, 높은 명예를 얻었다 해도, 기쁨이 있어야만이 우리는 과연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축복은 기쁨임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실상 기쁨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축복으로 여기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쁨이 있어도 건강을 잃는다면 축복이라 여기지 못합니다. 기쁨이 있어도 물질을 잃는다면 축복이라 여기지 못합니다. 또 기쁨이 있어도 직장을 잃는다면 축복이라 여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축복은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축복은 소유나 행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존재, being, 상태에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얼마나 가졌느냐? 건강하냐? 안전하냐? 가 아니라,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 어떤 존재가 되었느냐? 과연 기쁨을 가지고 사는 기쁨의 존재가 되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기쁨의 존재가 되었다고 믿습니까?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분명 예수를 믿음으로, 이미 기쁨의 존재가 다 된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인하여 여러분에게 주신 그 기쁨을 감추거나 소멸시키지 말고, 최고의 축복으로, 무엇이 있든 없든, 언제나 그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캘리포니아주 로마린다대 의대 정신신경면역학 연구자인 리버크 박사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웃음은 인체에 해로운 스트레스 호르몬을 감소시키고, 이로운 호르몬 분비를 촉진해 질병에 대항하는 인체의 면역기능을 강화해준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의사들의 연구보고서에도 1분동안 웃으면 10분 동안 에어로빅을 한 효과가 있고, 혈압이 낮아지고 심장혈관과 폐기능이 활발해져 폐활량이 늘면서 산소공급이 2배로 증가하고, 혈중 산소량과 엔도르핀을 증가시켜 면역체계가 강화되고 스트레스 호르몬도 감소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늘 기쁨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건강할 수밖에 없지만, 기쁨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은 건강도 잃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서 4장 4절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두 번이나 강조를 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시편 37편 4절은,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진정 어떤 상황에서도 여호와를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약속대로 여러분 마음의 소원도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어제 오후 설교준비를 마무리하고 있는데, 인재가 막 웃으면서 기쁜 모습으로 들어오더라구요. 정말 기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니 목사님 기도 좀 해주세요. 라고 해서 기도를 해주니까, ‘아, 속이 안 좋았는데, 좋아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또 다시 빙그레 웃고는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 말씀을 준비하고 있던 차라, 참으로 그 아이의 웃는 모습이 복되게 보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 아이에게 늘 그 기쁨이 떠나가지만 않는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마음의 소원대로 건강을 회복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느 미국인 변호사가 세인트루이스를 여행하던 중에 주일날 아침이 되어 지나가던 경찰에게 교회를 하나 소개시켜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개받은 교회를 찾아가면서보니까, 이상하게도 그 중간에 몇 개의 교회가 더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것에 그 경찰을 다시 만나게 돼서, 왜 가까운 교회도 많은데, 굳이 그 먼 곳에 있는 교회를 소개시켰습니까? 라고 물으니까, 이런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가 참 교회인지는 제가 가보지 못해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일날 아침마다 교통정리를 하면서 보니까, 그 교회에서 나오는 교인들은 항상 표정이 밝고 기쁨이 넘쳐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를 소개시켜드린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교회는 기쁨이 넘쳐야 할 줄 믿습니다. 기쁨이 넘치기만 하면 교회 부흥은 시간문제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메시야 교회가 부흥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여러분의 가정에도, 일터에도, 구역에도, 전도회에도, 항상 기쁨이 넘쳐흘러, 여러분의 가정이 잘되고, 일터가 잘되고, 구역과 전도회가 부흥하며,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역사를 체험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5장 10-11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의 삶은 무엇보다도 늘 주의 계명을 지켜 행함으로 그리스도의 기쁨이 충만한 삶이 되어 늘 진정한 기쁨을 누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