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 아브넬은 미갈을 데리고 다윗에게로 올 때, 자신의 안전을 믿고 20명의 종자만 데리고 왔다고 했는데, 오늘은 그런 그 아브넬이 요압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22절을 읽겠습니다.
“다윗의 신복들과 요압이 적군을 치고 노략한 물건을 가지고 돌아오니 아브넬은 이미 보냄을 받아 평안히 갔고 다윗과 함께 헤브론에 있지 아니한 때라.”
우리는 여기서 당시 다윗의 유다가 계속해서 전쟁을 벌였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그리고 또한 그 전쟁을 벌일 때마다 늘 승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 유다는 지난 번 말씀드린 대로 전쟁을 치룰 때마다 더욱 강해져만 갔다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과는 매우 대조적이죠?
그런데 다윗은 이런 노략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단지 그의 신복들만이 참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넬이 다윗이 있는 헤브론으로 내려왔을 때는 단지 다윗만 있었고, 요압을 비롯한 다른 신복들은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여러분 혹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나 아니면 아브넬이, 특히 아브넬이 이런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 것이라는 예감을 받지 않습니까? 왜요?
아브넬은 요압의 동생 아사헬을 죽인 자로써, 요압과는 철천지원수 지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압이 전쟁에서 돌아와보니까, 아브넬이 이미 왔다가 갔다는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요압이 돌아왔을 때, 혹이 요압에게 이 말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되겠습니까? 24절을 읽겠습니다.
“요압이 왕에게 나아가 가로되 어찌 하심이니이까, 아브넬이 왕에게 나아왔거늘 어찌하여 저를 보내어 잘 가게 하셨나이까?”
무슨 말입니까? 저를 죽였어야 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다른 의미로는 서운하다는 것이죠?
요압의 말 속에는 아브넬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왜 그냥 보냈느냐는 원망의 뉘앙스가 분명히 있습니다.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렇다면, 과연 다윗은 여기서 아브넬을 죽였어야 했을까요? 여기서 아브넬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강제로 통합하고 자신의 왕권을 든든히 했어야 했을까요?
과연 그래야 했을까요? 과연 여러분의 삶에 어떤 일의 절호의 찬스가 왔다고 해서 그 찬스를 붙잡는다고 약속까지 저버리면서 합당치 않은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 것은 괜찮은 일일까요?
과연 하나님이 섭리하시고 계시는 역사 가운데 우리의 손이 끼어들어 무엇을 주도적으로 이루려고 하는 일이 잘하는 일일까요?
다윗은 오직 미갈만을 원했고, 아브넬은 미갈을 데려왔습니다. 그런데도 과연 아브넬을 죽였어야 했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요압은 다시 말합니다. 25절을 읽겠습니다.
“왕도 아시려니와 넬의 아들 아브넬의 온 것은, 왕을 속임이라. 왕의 출입하는 것을 알고, 모든 하시는 것을 알려 함이니이다 하고”
요압은 역시 아브넬이 다윗을 속이고, 유다를 속이고, 유다를 잡아먹으려고 왔다는 식으로 말을 하고 있죠?
그러나 여러분 사실이 그런 것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죠? 그렇다면, 왜 요압은 이런 오해를 하고 있었을까요? 그가 단지 이 모든 일의 정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만 하였을까요? 아니죠?
그럼 왜 그런 것입니까? 그는 분노와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브넬이라는 인물이 그리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그의 마음이 현재 자신의 아우 아사헬을 죽인 요압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은 분별력을 잃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우리 안의 분노와 복수심 때문에, 혹은 좋지 않은 어떤 감정 때문에, 분별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사실을 사실대로 못봄으로,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는 일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압은 어떤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까? 26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다윗에게서 나와서 사자들을 보내어 아브넬을 쫓아가게 하였더니, 시라 우물가에서 저를 데리고 돌아왔으나 다윗은 알지 못하였더라.”
어떻게 합니까? 시라 우물가는 헤브론으로부터 불과 2.5km밖에는 떨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요압이 얼마나 신속하게 군사들을 보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먼저 다윗이 알지 못했다는 것은, 다윗의 명령을 어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무시하고 자신의 맘대로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분별력을 잃으면요, 이처럼 자기 맘대로 행동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7절을 읽겠습니다.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매 요압이 더불어 종용히 말하려는 듯이 저를 데리고 성문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를 인함이더라.”
요압이 다윗의 뜻과는 상관이 없이, 진심으로 다윗을 도와 이스라엘을 통합하려는 아브넬을 죽였다는 것이죠? 왜요? 단지 자기 동생을 죽인 것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분명히 이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요압이 죽였다는 것은, 요압이 그 살인에 있어서 주체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아사헬보다는 아브넬이 싸움을 더 잘하고, 아브넬보다는 요압이 더 싸움을 잘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찌하였든 지금 아브넬은 호위군대가 없으니까, 더 불리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죠?
율법을 보면, 고엘제도에 근거한 ‘피의 복수’규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것이 적용될 수 있습니까?
안 되죠? 왜요? 아사헬의 죽음은 전쟁에서의 죽음이었고, 또한 당시 아브넬의 공격은 어떤 면에서 본다면, 정당방위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압은 아무리 자신의 동생을 위한 복수였다고 하나, 어느 면에서도 사실은 그 살인에 대해 인정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제 33절로 34절에서 아브넬을 위한 애가를 부르고 있고, 거기서 아브넬은 살인자로 묘사되지 않고, 오히려 불의한 자에게 죽임을 당한 억울한 인물로 묘사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로 요압은 다윗에게도 불의한 자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오늘날 우리도 어떤 일을 감정적으로 처리하려고 한다면, 우리도 불의한 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선언합니다. 28절을 읽겠습니다.
“그 후에 다윗이 듣고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
왜 이런 말을 굳이 할까요? 물론 그것이 명백한 범죄라는 사실이기 때문이고, 또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사실 다윗이 이들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대로라면, 분명 아브넬의 평안을 보장했어야만 했던 것이죠?
그런데 아브넬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실제로 이 일에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에, 굳이 그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냥 자신의 부하 요압의 잘못을 품고 그냥 그대로 통합하지 않고 유다만 지키고 있었어도 아름다운 모습이라 할 수 있었을터인데, 왜 다윗은 그러지 않고 굳이 이런 표현을 하고 있었을까요?
왜 그랬겠습니까? 그것은 그런 인간적인 아름다운 모습보다도 더 큰 가치인, 바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는 또한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29절에서 요압과 요압의 집을 저주하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가장 큰 가치로 두고 판단하고 행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고 또한 인정보다는 정의를 더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기 위해 늘 판단하고 정의롭게 사심으로,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을 늘 돌려드리시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