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소식

할렐루야! 특새를 통하여 많이들 기도하시는데,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기도가 되시기를 바라며, 그래서 그 모든 기도가 다 응답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어려운 환경에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마저 없다면 우리는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고 했는데, 어떻습니까? 사실 우리는 이런 경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 도대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우면 기도하고 싶은 마음마저도 없을까?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죠? 여기서 말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관계하지 않으려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죠? 인간의 모든 생사화복이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스펄젼 목사님“기도하지 않고 성공했다면 성공한 그것 때문에 망한다.”고 했고, 또 유명한 기도의 사람, E M 바운즈“기도의 실패자는 생활의 실패자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기도란 우리 삶에 얼마나 많은 비중을 차지해야 할까요?

 

그러나 사무엘 선지자가 기도 쉬는 것을 ‘죄’로 표현한 것이나,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한 것을 보면, 우리는 정말로 많이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난 한해 얼마나 기도생활에 성공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앤드류 머레이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기도로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다. 사탄이 교인들에게서 이 무기를 빼앗거나 그것의 사용을 제지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단이 가장 최선을 다하는 때 가운데 하나는, 바로 성도의 기도를 방해하는 일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방해를 받을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때는, ‘아, 지금은 사단이 방해를 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깨닫고는, 그것을 반드시 넘어설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2016년도 여러분은 언제나 여러분의 기도를 방해하는 사단의 방해를 이기고 기도의 문턱을 넘어서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에 오늘 본문도 보면, 역시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는데요,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40장부터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말씀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0장으로 42장에서는 구원자를 통한 구원의 제시하게 하셨고, 43장으로 45장에서는 고레스를 통한 구원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46장으로 48장에서도 역시 바벨론의 멸망에 따른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준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동일한 메시지를 반복케 하시고 있는가? 그것은 이들이 포로된 환경에서 다른 것에 압도되거나 절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을 통하여 주시는 모든 말씀들 속에서 동일하게 반복되는 주제 가운데 하나도 역시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이죠? 왜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멸망과 구원을 통해 보여주신 그 해답은, 반드시 우리가 그래야만 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도 우상을 섬기거나 혹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긴다면, 어떤 경우에도 먼저 우상이 우릴 지켜주지 못할 것이지만, 또한 하나님도 결코 우릴 가만 놔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것을 몰라도 결단코 다른 우상을 섬기는 일은 절대로 좌시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인 것이죠? 어찌 보면,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을 잘 사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주 거추장스러울 만큼이나 극한 사랑을 나타내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불평해서야 되겠습니까? 엄밀히 말한다면, 그것은 영적 교만이고, 사치인 것이죠?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정말로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이에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말씀인데,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는 처녀 바벨론에 대한 심판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같이 1절을 읽겠습니다. “처녀 딸 바벨론이여 내려와서 티끌에 앉으라 딸 갈대아여 보좌가 없어졌으니 땅에 앉으라 네가 다시는 곱고 아리땁다 일컬음을 받지 못할 것임이라.” 특이한 것은 오늘 본문에서도 바벨론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을 삼중으로 선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5절, 6-9절, 9-11절입니다. 이에 먼저 1절에서는 바벨론을 일컬어 ‘처녀 딸 바벨론’이라 했는데,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요? 존 칼빈은 여기서 바벨론이 처녀로 불렀던 이유는, 처녀가 남자에게 몸을 내어주지 않은 것처럼, 바벨론이 당시까지 다른 나라들로부터 유린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어떻습니까? 바벨론은 그만큼이나 강대국이었죠? 그래서 한번도 누군가의 침략으로 주권이 유린된 적이 없다는 것이죠? 그러나 머지않아 이들은 메대와 바사의 고레스에 의해서 철저하게 유린당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처녀 딸 바벨론’이라는 것은, 그 의미야 어떻든, 우리가 듣기에도 뉘앙스가 좋지 않듯이, 이것은 그들을 조롱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연 너희가 한번도 다른 나라에 유린당한 적이 없는가? 그런가? 그렇다면 어디 한번 두고 보자! 사실은 반드시 유린당하고 멸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조롱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에 ‘내려와서 티끌에 앉으라’ 했는데, 여기 티끌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아파르’라는 단어는, 뱀이 당한 심판 가운데 하나인 ‘흙을 먹는 일’에서, ‘그 흙’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근동의 패자로 군림하였지만, 앞으로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높은 지위에서 내려와 그 멸망의 자리로 까지 낮아지며, 거기서 큰 고통과 슬픔에 잠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딸 갈대아여 보좌가 없어졌으니 땅에 앉으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요, 바벨론이 멸망할 당시, 바벨론 왕은 외국 원정길에 있었고, 바벨론성에는 벨사살이라는 2인자가 있었는데, 바벨론 왕이 돌아오기도 전에, 메대와 바사가 쳐들어와 벨사살을 죽이고, 바벨론 왕조의 명맥을 끊어버림으로, 바벨론 왕좌를 없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제 어떻게 합니까? 그러므로 ‘땅에 앉으라’ ‘네가 다시는 곱고 아리땁다 일컬음을 받지 못할 것임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그의 처참한 모습은 2절에서 “맷돌을 가지고 가루를 갈고 너울을 벗으며 치마를 걷어 다리를 드러내고 강을 건너라” 무슨 말입니까? 이것들은, 노예나 포로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명령들이었습니다. 맷돌을 가지고 가루를 가는 일은 고대 근동에서 주로 여자 종들이 하던 일이고요, 그 다음 너울을 벗으라 했는데, 너울은 뭡니까? 면사포를 말하죠? 그렇다면, 당시는 누가 이런 너울을 썼겠습니까? 귀족들이죠? 이에 이것을 벗으라는 것은, 바로 신분의 변화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제 귀족과 왕족에서 아주 천한 천민의 자리로 내려갈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치마를 걷어’라는 말은, 치마를 다 벗으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옷을 완전히 다 벗긴 채로 포로로 끌려가는 장면을 연상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을 건너라’는 말은, 이제는 강을 건너기까지 멀리 멀리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습니까? 이제 이들은 정말로 비참한 신세가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3절은 또 말합니다. “네 속살이 드러나고 네 부끄러운 것이 보일 것이라. 내가 보복하되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리라.” ‘속살이 드러나고 부끄러운 것이 보일 것’이라는 말은 무슨 말인지 짐작이 가시죠? 실로 그들은 엄청난 수치를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복하되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이렇게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보복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이들이 하나님을 화나게 했던 이유는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사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채찍질할 도구로 사용하셨던 자들이죠? 그런데 왜 이제는 이들을 이렇게나 짓밟으시겠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두 가지로 봅니다. 첫째, 이들이 너무 도에 지나치게 하나님의 백성을 잔혹하게 짓밟았다는 사실이고요, 둘째, 하나님이 이들을 사용하시기 위해서 이들을 그렇게 높여주시고 백전백승하게 하시니까, 이제는 이들이 너무나 교만하여서 자기 자신들 밖에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때리시는 이유는, 자기 백성이 미워서가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이 하나님 때문에 이스라엘을 때린다 하더라도 자기들 맘대로 그렇게나 혹독하게 때릴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만일 학교 선생님에게 자녀를 훈계하고 매질을 해달랬다고 해서, 선생님이 여러분의 자녀를 반쯤 죽여놓는다면, 여러분의 심정이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이들은 지금까지 너무나도 그 하나님의 백성들을 극심하게 짓밟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은혜도 모르고 하나님보다 교만해지려는 자를 하나님은 과연 가만 놔두시겠습니까? 야고보서 4장 6절은,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에게 큰 복을 주신다 할지라도 늘 겸손한 자가 되도록 힘써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조금 일이 잘되고 조금 높아졌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자기 맘대로 하려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은 잘라버려야 할 것이지, 결단코 그 마음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를 물리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4절은, “우리의 구원자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거룩한’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은 그 어떤 인간과도, 어떤 권력자와도, 어떤 우상들이나 귀신들이나 사단과도 다 구별된 분이시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바벨론의 모든 신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유일하신, 초월적인 권능으로 구원을 행하실 절대전능자이시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 하나님이 또한 여러분의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그래서 오늘 새벽에도 말씀드렸지만, 이런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 되어주심을 믿는 사람은 결코 어떤 일에도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편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내편이 되어달라고만 하면 곤란하겠죠? 그렇죠? 성도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주장과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편에 서는 자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지 않고 내 주장과 뜻을 가지고 하나님이 내편에 서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절대로 가만 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5절은, “딸 갈대아여 잠잠히 앉으라. 흑암으로 들어가라. 네가 다시는 여러 왕국의 여주인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이제 바벨론은 항의조차 할 수 없는, 죽음과 지하세계의 고통 가운데로 들어가는, 참으로 그들이 주장하던 왕국의 여주인이 스올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마는 비참하고 처참한 지경에 이르게 됨을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형제자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할 줄 믿습니다. 2)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보다 교만한 자가 되어서는 아니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6절로 9절은, 이들의 구체적인 죄악상과 갑작스런 멸망을 말하는데요, 6절을 읽어볼까요? “전에 내가 내 백성에게 노하여 내 기업을 욕되게 하여 그들을 내 손에 넘겨주었거늘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늙은이에게 네 멍에를 심히 무겁게 메우며” 먼저는, 하나님의 자녀가 곧 하나님의 기업이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에게 잘못한 것이 곧 하나님의 기업을 욕되게 한 일이라는 것이죠? 이에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늙은이에게까지 무거운 멍에를 메운 것이 하나님의 노여움을 샀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를 긍휼히 여길 수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이것은 성경입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자가 믿는 자에게 해야 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일뿐 아니라, 또한 믿는 자가 믿는 자에게 해야 할 도리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7절은, “말하기를 내가 영영히 여주인이 되리라 하고,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며, 그들의 종말도 생각하지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또 문제입니까? 먼저 여기 ‘영영히 여주인이 되리라’는 말은 오직 유일하게 영원한 지배권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도 누구든지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그 허락하시는 기간 동안에만 왕도 하고, 대통령도 하고, 국회위원도 하고, 담임목사도 하고 하는 것이지, 결코 ‘내가 영원히 이것을 하리라.’ 혹은 ‘내가 은퇴할 때까지 이것을 하리라’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커다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그 영원히 번성할 것 같았던 앗수르의 멸망을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선민이라도 하나님 앞에 범죄할 때 하루아침에 망하게 되는 것을 보면서 깨달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함으로 결국 말씀처럼 멸망하는 짐승이 되고야 말았다는 사실입니다.(시49:20) 그래서 또한 ‘이 일을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며 종말도 생각지 아니하였다’ 무슨 말입니까? 여기 ‘이 일’은, 하나님께서 노하셔서 이스라엘을 바벨론에게 넘겨주신 일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다만 자신들이 대단하기에 이스라엘을 정복했다고만 생각했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죄의 결과인, 종말도 생각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늘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는 것이 우리 삶의 성패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여러분은 날마다의 삶 속에서 과연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항상 깨닫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느 날 사자와 이리와 여우 셋이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래서 공동으로 사냥감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때 사자가 이리에게 말합니다. ‘야! 이리야 네가 이것을 나누어라.’ 그러자 이리는 아주 정확하게 그 먹이를 삼등분해서 나눴습니다. 그랬더니 사자가 맘이 불편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명색이 내가 사자인데, 어떻게 너희와 똑같이 나눌 수가 있는가? 그래서 사자가 이리를 잡아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제 여우에게 사자가 먹이를 나누라고 했습니다. “야, 임마, 네가 나누어라.” 그러자 여우가 어떻게 했을까요? 이제는 여우가 사양을 했다고 합니다. “아유, 사자님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나누다니요? 사자님이 나누셔야죠? 저는 그저 사자님께서 다 잡수시고 남으면 그것 조금 먹으면 됩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자 사자가 말합니다. “야 머리가 잘 돌아가네. 똑똑하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해냈나?”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우가 말하기를 “네, 아까 사자님이 이리 잡아먹는 것 보고 깨달았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이솝 우화가 주는 교훈은 바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깨달아야 살고, 죽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신앙생활도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줄 알아야 우리가 망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이죠?

 

이에 8절은,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고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것이 바로 깨닫지 못한 자들의 행동인 것이죠? 그들은 사치하고, 평안히 무사안일주의로 지내며 자기 밖에는 모른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자신들은 절대로 망하는 일이 없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뭐라고 하신다는 것입니까? 10절로 11절에서 말씀하죠?

 

이에 먼저 거꾸로 11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 하나님은 결론적으로 뭐라 말씀하십니까?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는 것이죠? 그것도 근원도 알지 못하는 재앙, 또 물리칠 수 없는 능력의 파멸이, 갑자기 그에게 임하는데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사실 바벨론왕은 해외로 원정을 간 상태에서 철옹성과 같은 바벨론성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죠? 전에 한번 보여드린 바와 같이, 바벨론성은 성벽을 너무나 철저히 완벽하게 쌓아놓아 개미 한 마리도 들어오기 힘들었기 때문에, 도저히 그 성이 함락되리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것이죠? 그러나 메대와 바사가 어떻게 그 성을 탈환하고 벨사살을 죽였다고 했습니까? 성문으로나 성벽으로는 도저히 쳐들어갈 수가 없고, 그래서 성 가운데 흐르는 그 큰 강물을 상류에서 완전히 틀어막아 물길을 돌려서 그리로 쳐들어가 성을 함락했다고 했죠? 어떻습니까? 이것은 인생은 아무리 지혜롭고 완전하다 싶은 사람도 다 약점이 있다는 것이죠? 오직 누구만이 약점이 없다는 것입니까? 하나님만이 결단코 약점이 없고, 완벽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지해야 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고, 이에 아무리 세상에서 지혜롭고 완전하며, 그래서 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간 사람이라 할지라도 언제나 겸손함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는 반드시 넘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 아래 하나님 같은 분은 하나님 한분만 존재하시기를 절대로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10절은, 이들이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구체적인 이유를 말하는데, 다같이 읽겠습니다.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바벨론은 누굴 의지했다는 것입니까? 결국은 자신을 의지했다는 것인데, 그것이 뭐라는 것입니까? ‘악’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이들이 스스로의 악함을 의지했는가? 그것은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고 했죠? 그것도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했는데, 어떻습니까? 저는 저나 여러분이나 항상 이런 유혹 가운데 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과연 누가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 수 있는 자라는 것입니까? 그는 언제나 그 유혹을 이기는 자라는 것이죠? 다시 말해 그는 날마다 자신의 지혜와 지식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할 줄 아는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12절로 15절은, 이제 하나님이 심판하시니 한번 맞서 보라 구원해 보라고 하시는데, 이 말은 아무도 그도 그를 도울 수 없다는 것이죠?

 

뉴욕에 East 34th St.에 있는 신체장애인회관에 가면, 응접실 벽에 시 하나가 쓰여진 동판이 하나 걸려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로이 캄파넬라라는 사람이 물리치료를 위해 일주일에 두 세 번씩 휠체어를 타고 몇 달이나 그곳을 드나들었는데, 한번도 그 글을 읽지 않다가, 어느 날 그 글을 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읽다가 또 읽고 또 읽게 되면서, 그 눈에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 비통과 절망의 눈물이 아닌, 용기와 희망의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무명용사가 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한 시”였는데요, 이렇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나를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모든 일에 성공할 수 있도록,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습니다. 겸손함을 배우도록.

 

나는 건강을 기도했습니다.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러나 나는 허약함을 받았습니다. 더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나는 부유함을 기도했습니다. 행복할 수 있도록. 그러나 나는 가난함을 받았습니다. 지혜를 가질 수 있도록.

 

나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그러나 나는 열등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나는 모든 것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그러나 나는 삶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도록.

 

나는 내가 부탁한 것들을 하나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나는 하찮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내 무언의 기도를 다 들어주셨습니다.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정말 여러분의 도움이신 줄 믿습니다. 그분만이 여러분의 도움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2015년도 얼마나 그분만 의지하였는지를 돌아보시고, 2016년도에는 오직 그 하나님만 의지하겠습니다. 분명히 고백하며 그렇게 기도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여러분의 모든 기도에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찬송가 484장 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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