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삶을 살도록 돕는 QT(경건의 시간) 체험학습 과정으로 이 기간 동안 성경을 삶 속에 적용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실제적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으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훈련하며, 적용하는 과정입니다.
할렐루야! 주의 평안과 축복이 여러분의 가정에 늘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지난 달은 겸손의 달로 정하여 겸손에 대해서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 한 달 얼마나 겸손해 지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겸손하기로 소문난,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이, 하루는 어느 교회에서 너무나도 은혜로운 설교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오고 있는데, 그 앞에 어느 교인이 딱 서서 이런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목사님, 오늘 설교가 너무 좋았습니다. 정말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요, 이렇게 제일 먼저 이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존 번연 목사님이 뭐라고 하셨을까요?
“당신은 늦었습니다. 내가 강단에서 내려오기도 전에 이미 마귀가 먼저 내게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존 번연과 같이 항상 깨어 사단의 역사를 분별하는 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래야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찌하면 사단에 넘어가지 않고 늘 겸손함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지난 달 암송했던 2010년 주제성구인 빌립보서 2장 5절로 8절을 보면, 그것은 종의 형체를 가지고 복종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같이 한번 암송해 볼까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낮춰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기 자기를 낮추시고 다음에 무엇이 나옵니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겸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다같이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복종하는 자가 됨으로 늘 겸손한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자어 복종(服從)이라는 단어를 보면, 옷 복, 좇을 종을 쓰고 있습니다. “옷을 보고 따른다.” 혹은 “옷에 따른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분을 보고 따른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종은 결국 무슨 말이 되는 것입니까? 종이 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한 순간의 겸손은 어렵지 않아도, 계속 겸손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종이 되어 살면, 그는 언제나 겸손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종이 되는 삶을 살 수 있고 보여줄 수 있습니까?
빌립보서 2장의 말씀처럼 늘 복종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2월 한 달을 복종의 달로 정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2월 한 달은 정말 여러분 모두가 서로에게 복종함으로 종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이 더 낮아지고 겸손해질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복종해야 하겠습니까?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함께 그 해답을 찾아보기를 원합니다.
진정 예수님은 무엇에 복종하셨으며, 또한 어떻게 복종하셨는가? 본문을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본문은 전능하신 예수님이 마침내 대적들의 손에 의해서 체포를 당하기 바로 직전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이미 수차례 자신이 수난을 당하실 것을 말씀했고, 또 본문의 바로 앞에 기록되고 있는 최후의 만찬에서는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아셨고, 그러므로 이제 때가 되매 심히 고민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 38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이미 아셨고, 또 이것 때문에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왜 그렇게 심히 고민하셨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본문이 주는 교훈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분명 그가 심히 고민했던 이유는, 그가 사단에게 고난을 당하셔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십니까? 그는 홀로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거룩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찮고 사악한 사단이 주는 고난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과연 쉽게 용납하실 수 있으셨겠습니까?
사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목적이요, 유일한 목적은, 인간에게 구속의 사랑을 베푸시기 위해서였던 것이지, 결코 사단에게 시험을 받고 고난을 당한 것이 주된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제 인류를 구속하려는 목적을 이루려면 고난을 받으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처음 그가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사단에게 세 번 시험을 당했던 것과 같이, 이번 일을 당하시면서 세 번의 기도를 드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저는 이 기도 속에 이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정녕 이 방법 밖에는 없습니까?
전능한 우리는 이 방법이 아니더라도, 인류를 구원할 방도가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혹 그냥이라도 용서해 주시고, 성령을 각 사람 마음에 보내주셔서 아버지의 뜻대로 살게 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신학적으로 구원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협의에 의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대답은 무엇이겠습니까?
No! 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또한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은 왜 굳이 그 아들을 사단의 권세에 내어 주시면서까지 이처럼 우리를 구원하셔야만 하셨겠습니까?
그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실 뿐만 아니라, 또한 공의로우신 분이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4장 7절은, 하나님은,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보응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죄는 용서를 받을 수 있어도, 하나님의 형벌은 여전히 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은 인류가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을 수는 있어도, 반드시 그 죄값은 치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용서해도 형벌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형벌을 인간에게 지우지 않으시고, 자신의 아들 예수로 하여금 사단의 권세에 내어줌 바 되어 십자가를 지게 하심으로, 대신 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신학적으로 대속적 은혜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계획을 아시는 예수님은 사단의 권세 앞에 자신을 내어주어야만 하는 현실 앞에서, 다시 한번 하나님께 울부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39절을 보면, 같이 갔던 제자들에게도 기도를 요청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9절에는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셨지만, 41절에는 더 정확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기도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들과 함께 하였던 제자들에게도 기도를 요청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자신의 호위를 요청하시는 것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사단이 이제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잡아먹으려고 혀를 낼름거리며 입맛을 다시고 있는 그것을 아신 예수님은, 자신의 아버지와의 기도가 방해를 받지 않도록 제자들에게 기도를 요청하셨다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또 한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 번민에 빠졌을 때는 더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깨어 기도해야 하고, 또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에게 기도를 요청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종종 심각한 문제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고, 시험이 닥쳐왔다고, 상처를 입었다고, 뭐가 어떻다고 딜레마에 빠져 기도를 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은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기도 쉬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 그러면 더 큰 시험에 빠질 수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단에게 틈을 내주어 더 시험에 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분을 오래도록 품으면 마귀가 틈을 탄다고 했죠?(엡4:27)
에베소서 6장 18절은,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정말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무시로 성령 안에서 깨어 기도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어떻게 하였다고 했습니까? 잠을 잤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책망하시며,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육신이 약해서 기도하지 않아도 책망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 입니다.
그러나 39절을 보면 예수님은, “조금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복종하기 위한 올바른 기도 자세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기도자세를 보면, 서서 두 손을 들고 하는 기도가 있고, 무릎을 꿇어서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셨다는 것은, 정말 완전히 자신을 비우고 낮추어 절대적이고 적극적으로 복종하겠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는 처음부터 복종하기 위한 기도였던 것이지, 항변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도 복종하는 자가 되려면, 먼저 우리의 자세를 낮추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기도할 때 자세를 낮추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머리를 꼿꼿히 들고, 그냥 편한 자세를 하고 앉아서, 혹은 의자 밑으로 다리를 쭉 뻗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분명 기도하는 그 자리에는 반드시 그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와 계시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어찌 머리를 들고 편한 자세로 혹은 다리를 뻗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바와 같이 인식하지 못하며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지적하셨던 바리새인의 기도와 같이, 외식하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순간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하는 두려운 순간인 것입니다. 예배하는 순간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결코 제 말을 듣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 자리는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졸면 되겠습니까?
눈을 감는 것 하고 조는 것은 다릅니다. 너무나 피곤해서 조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예 처음부터 말씀을 외면하고 졸고 있다면, 예배드리는 그 중심을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예배할 때, 신령과 진정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두고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아마 오늘날 오신다고 하셔도 똑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외식하지 말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이신다고,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기도하거나 예배하지 마시고, 반드시 계심을 보는 바와 같이, 기도하고 예배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외면치 않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와 같이 복종하겠다는 의지로 드린 기도의 내용 역시도 복종하겠다는 의지가 아주 강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같이 39절 예수님의 기도를 읽어보겠습니다.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앞의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이, 복종코저 하는 자는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준다면, 여기 이 기도의 내용은 복종코저 하는 자가 마땅히 드려야 할 기도의 내용을 가르쳐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첫째, 자신의 소원도 말씀드리고, 그러나 둘째,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대로만 되기를 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안에 받게 될 그 엄청난 고통으로 심히 고민하셨습니다.
또 그래서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가 드리는 기도의 결론은 무엇이었습니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것입니다.
그의 기도는, 그의 근심을 아뢰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에는 아버지의 뜻을 찾고, 그것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기도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엄청난 고통이라도 그것이 아버지의 원이시라면, 저는 오직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만을 소원합니다. 아버지 저를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루옵소서.” 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고, 존경스럽습니까?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자꾸 내 마음을 관철시키고 하나님의 마음을 바꿔 놓으려고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는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군데 합니까? 내가 그래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수치스럽게도 인간들에게 침뱉음을 당하고 뺨을 맞고 욕을 먹으며 채찍에 맞으며, 또 그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지겠습니까?
우리도 그럴 때가 있죠? “하나님 내가 그래도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까? 직분자가 아닙니까???”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가 수치당하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그것도 감당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참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성도 여러분, 우리가 부르짖고 또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원한을 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뭘 풀어주신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원한입니다.
또 여기 재판관은 불의했기 때문에 마땅히 들어주어야 할 그 여인의 정당한 원한을 들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기도는 이런 말씀의 진정한 의미와는 상관없이, 어떻게 기도합니까?
그저 이것이 어디 어떻게 적용되는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내 소원만 들어달라고 기도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마태복음 6장 7절은,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중언부언이 무엇입니까? 어느 주석을 보니까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잡다할 정도로 말을 길게 끌거나 아무 의미없는 말을 거듭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잡다한 말이며, 무엇이 의미없는 말이겠습니까?
그것은 전혀 하나님의 뜻과는 달라서 아무리 수만번을 기도한다하더라도, 응답받지 못할 그릇된 기도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올바른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기도가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는 기도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정직한 기도는, 기도를 하면 할수록,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품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복종케 만들고야 마는 가장 좋은 수단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열 두 영이나 되는 천사를 부르실 수 있으심에도, 기꺼이 아버지 하나님께 복종하심으로 자신을 잡으러 온 자들에게 자신을 내어주셨고, 그리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는 사악한 존재에게 당하는 수치와 모욕과 멸시와 천대와 고통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감내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하여서는 거리끼는 것이 없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중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북경반점의 경영자가 전화로 종업원을 오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몇 번을 전화했는데도 오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왜 몇 번을 불러도 오지 않느냐”고 야단을 쳤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이 종업원이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경영자님, 용무가 있는 것은 당신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나를 부르지 말고 당신이 이쪽으로 와서 말하면 될 게 아닙니까? 나도 내 용무가 있으면 그쪽으로 갑니다. 그러니 사람은 다 평등한 것이니까, 당신이 용무가 있으면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모택동의 귀에까지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택동이 할 말이 있을 것 같아서 두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북경반점의 경영자를 보면서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자네는 내일부터라도 이 종업원이 하는 일을 할 수 있겠느냐?”
“물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종업원 생활을 해 왔으니까요”
모택동이 말했습니다. “그렇겠군. 그러면 종업원 자네에게 묻겠네, 자네는 내일부터라도 이 경영자가 하는 일을 자네 힘으로 해낼 수 있겠는가?” 그랬더니 이 종업원이 “그것은 어렵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왜냐”고 물으니까, “저는 경영자 생활을 해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모택동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답은 뻔한 것이 아닌가? 자네의 경영자는 언제든지 자네가 하고 있는 일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자네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없다고 한다. 간단한 이치다. 일을 할 수 없는 자는 할 수 있는 자의 말을 듣는 것이 당연하다. 인간의 권리는 어디까지나 평등한 것이지만, 사람에는 재능의 차이도 있고, 인격의 우열도 있다. 뛰어난 사람의 지시에 솔직하게 따름으로써 비로소 질서가 잡히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타이르고 혹시 이런 점을 잘못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그 이유를 모든 중국인에게 알리게 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인간이 되실 수는 있어도, 인간이 하나님이 되실 수는 없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하나님께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가 복종해야 할 네 가지 권위가 나오고 있습니다.
먼저 디도서 3장 1절에서는,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라”고 했고, 히브리서 13장 17절에서는,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6장 1절에서는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했고, 에베소서 5장 22절에서는 남편에게 복종하라. 그리고 에베소서 5장 21절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국가의 권위이고, 둘째는 교회의 권위이고, 셋째는 가정의 권위이고, 넷째는 성도의 권위인 것입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6장 1절은 주안에서 순종하라고 했죠?
아무리 우리가 국가 지도자의 권위를 따라야 하고, 교회 지도자의 권위를 따라야 하고, 가장의 권위를 따라야 한다 하더라도, 결국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 그 모든 권위들도 역시 하나님께 절대복종해야 하는 권위들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끼리는 피차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는 서로 서로에게 종이 되심으로 서로에게 복종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고로 익은 곡식일수록 머리를 숙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머리를 숙이는 일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여러분에게 바보가 되자는 말씀을 드렸는데, 이제는 좀 더 나아가 다른 이들을 정말 잘 섬기는 현명한 종이 되어보시기를 바랍니다. 거기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며,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