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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삶을 살도록 돕는 QT(경건의 시간) 체험학습 과정으로 이 기간 동안 성경을 삶 속에 적용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실제적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으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훈련하며, 적용하는 과정입니다.

희생(요12:23-33)

조회 수 307 추천 수 0 2010.03.09 17:45:38

할렐루야! 지난 한 주도 주의 은혜 가운데 평안하셨습니까? 이 시간도 먼저 여러분 가운데 그리스도의 평강이 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기 위한 2010년 첫 달은 겸손의 달로, 그리고 둘째달인 지난달은 복종의 달로 지켰습니다.

이번 3월 달은 희생의 달로 지키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주제로 삼아온 말씀의 근거인 빌립보서 2장을 보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바로 희생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겸손과 복종은 결국 희생으로 나타났으며,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겸손과 복종과 희생은 결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3월 달은 사순절 기간이고, 또 고난주간이 있기 때문에 이 달을 희생의 달로 정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희생이란 무엇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두 가지 정의가 나오고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사람이나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 재산, 명예, 이익 따위를 바치거나 버림, 또는 그것을 빼앗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 생각하는 희생의 보편적인 의미이죠? 그래서 우리는 희생한다고 할 때,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한다는 말을 쓰곤 합니다.

그러나 둘째는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바치는, 산 짐승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소나 양이나 염소와 같은, 살아있는 짐승을 희생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성경에서 말씀하는 희생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희생의 의미는 첫 번째 사전적인 의미이겠지만, 그러나 본래 성경에서 희생이란 말은, 짐승을 산채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 시대 제물로 드려졌던, 하나님께 대한 ‘산 제사(living Sacrifice)’를 의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통해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진정한 희생이란, 인간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먼저 하나님께 대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 다음은 우리 자신을 산채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먼저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아름다운 희생의 생애를 보낼 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아무도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희생하지 않고는, 아무리 다른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하여도, 그것이 진정 아름다운 희생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이 땅에 내려오셔서 하나님 앞에서 산 제물이 되셔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정 그에게 원하셨던 희생은, 그의 능력이나 위치와 같은 것의 희생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 자신이셨던 것입니다.

이에 본문은 그와 같은 희생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의 희생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며,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희생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본문의 상황은, 예수께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신 후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한 종려주일사건이후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3년간의 공생애를 통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보여주셨던 모든 능력과 권세의 결과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맞아 그를 이스라엘의 왕이라 부르며 환영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하시고 있습니까? 오늘 빌립과 안드레를 통하여 헬라인들이 예수님 뵙기를 청한다는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 첫마디로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상황에서 이 말씀은 어떤 의미로 들렸겠습니까?

아마도 예수님이 이 말씀만 하셨다면, 빌립과 안드레는, 예수께서 예수를 환영했던 민중들의 소원대로 그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여 이스라엘을 해방하겠다는 말씀으로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24절을 보면, 예수께서 영 뉴앙스가 다른 말씀을 이어서 하시고 있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한 알의 씨앗이 죽음이라는 희생을 통한 수많은 열매를 태동하게 되는 지극히 보편적인 자연의 진리를 말씀하시고 있죠?

그러나 이것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까? 이제 예수께서는 한 알의 밀알과 같이 죽어, 수많은 사람들로 구원을 얻게 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그가 반드시 죽어야지만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희생의 필연성을 말씀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의 죽음이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인가? 질문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가 죽으면, 그 자신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지, 어떻게 그것이 다른 사람들 특히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의 방도가 되겠습니까? 어떻게요?

히브리서 10장 3절이하를 보면, 구약의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고 했고,

그러므로 10절을 보면,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고 했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께 드리는 예비된 완전한 제물의 희생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2절은, “내가 땅에서 들리면” 이란 표현을 썼고, 이에 33절은,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을 보면, 예수께서 니고데모와 대화를 나누시면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불신앙으로 인해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갈 때, 모세가 장대 끝에 놋뱀을 매달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이제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죄로 인하여 사단에 물려 죽어갈 인류를 위하여 스스로 놋뱀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그를 보고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하시겠다는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실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서 온 인류 가운데 들림으로, 그를 보고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하시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희생을 당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희생이 결코 하나님께 대한 복종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희생일때라야만이, 온전한 열매를 거둘 수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반드시 예수 그 자신이 죽으셔야만 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님은 이와 같이 자신이 온 인류를 위해서 죽으셔야 하는 사실만을 나타내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시고 계셨던 것일까요?

아니죠? 우선 우리는 24절의 말씀이 예수님에 관한 개인적인 말씀이 아니라, 보편적인 진리라는 사실에서부터, 그리스도의 희생이 또한 우리의 희생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예수님의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아무리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라 할지라도, 먼저 우리 자신이 죽어야 우리 가족이 살아나고, 교회가 살아나고, 국가와 민족이 살아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한국교회사 초기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제중원 2대 원장인 헤론이라는 의사가 있습니다.

그는 미국 테네시 의과대학이 생긴 이래 가장 우수한 성적을 올린 수재였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교수직을 권유했는데, 그는 너무나도 선교의 열정에 불탄 나머지 교수직을 사양하고, 1885년 내한하여 의료선교사로 헌신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5년 뒤인 1890년 여름, 한국에는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그 질병의 자리를 떠나게 되었는데, 이 헤론 선교사님은 그 전염병과 폭염속에서도 결코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환자치료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은 병을 치료받고 나을 수 있었지만, 그는 결국 더위와 과로에 지쳐 자신도 이질을 앓다가 3주만에 젊은 아내와 두 딸을 남겨놓고 선교지 한국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희생은 비단 헤론 선교사님만이 아니었습니다. 26세의 어린 나이로 조선땅에 와서 8개월간의 짧은 선교활동을 마치고 사망한 루비 켄드릭 선교사는,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고 했습니다.

언더우드와 함께 최초로 조선땅에 들어온 정식 선교사 아펜젤러의 무덤에는 시신이 없는데, 그 까닭은 군산 앞바다에서 그가 탄 배가 침몰할 때, 한국인 소녀를 구하다가 익사해서 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과연 이들의 희생이 어떤 희생이 되었습니까?

결국 그들의 희생은 많은 조선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그것이 한국교회의 생명의 씨앗이 되어, 다른 선교사님들의 희생과 함께 오늘날 한국교회에 세계 교회사에 유례없는 부흥을 가져오게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희생하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들의 희생이 과연 누구를 위한 희생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얼핏 겉으로 본다면, 조선인들을 위한 희생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들이 그 땅에 온 목적을 안다면, 우리가 그들의 희생의 이유를 그렇게만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죠?

그들의 희생은 선교사로써 먼저 조선인의 생명을 영원히 살리겠다고 헌신한 하나님께 대한 희생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전염병이 창궐해서 자신에게 목숨의 위협이 있었어도, 어떤 죽음의 위협이 있었어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결단했던 헌신의 서약을 결코 물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그런 헌신적인 하나님에 대한 희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당시 그로 인하여 치료를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과 그 주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먼 훗날 그들과 상관이 없는 조선 땅의 수많은 사람들에게까지도 영혼을 구원하는 놀라운 열매를 맺게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이 죽는 희생을 말씀하신 까닭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희생이 바로 그와 같은 것이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냥 죽는 한 사람의 죽음은 허무한 죽음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희생은 반드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음과 같이, 엄청난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고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사람에 대한 희생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에 대한 희생을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그로 인하여 더 엄청난 열매를 맺게 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한 알의 밀이 죽는 희생은, 분명 엄청난 열매를 필연적인 결과로 하고 있다는 사실 속에서 우리는 성도의 하나님에 대한 희생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무엇에 대해 희생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본문에서 우리 주님은 세 가지를 가르쳐 주시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25절에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희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같이 25절을 읽겠습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자기 생명을 미워하지 않으면 영생하도록 보존될 수 없다는 구원론의 본질을 말씀하시고 있죠? 영생을 위한 희생의 절대필요성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희생은 과연 무엇일까요?

헬라어 원문을 보면, 여기 ‘생명’에 해당하는 ‘프쉬케’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에 따라 추구되어지는 모든 육신의 욕망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생이라는 헬라어 ‘조에’라는 단어는, ‘영원한 생명’ 곧 영원히 죽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25절에서 예수님이 말하는 우리의 희생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간의 모든 본능적 욕구에 대한 희생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반드시 모든 육체적 욕망을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억제가 아니라 희생으로 말입니다.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중생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생이 하나님 앞에서 한 알의 밀알과 같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희생이 되려면, 먼저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다시 새사람으로 변화되는 중생의 역사를 체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변화된 새 사람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날마다 삶 속에서 깨닫는 것은, 우리 내면의 밑바탕이 깨끗함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결코 특별한 이유가 아니고서는 우리 삶에 많은 열매를 거두게 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대부분 내 삶에 나타나는 결과는 나의 영적 상태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느끼고 있습니까? 저는 이것을 아주 민감하게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애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냥 너무나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결국 우리의 고민은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아무리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보아도 우리의 영적 상태는 늘 불완전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마태오라는 사람이 성자 프란체스코에게 “당신은 용모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높은 학식도 없는데, 어째서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말을 듣기를 바라며, 당신에게 순종하고자 하며, 또 당신과 함께 있기를 바랍니까?”라고 물으니까, 프란체스코가 하늘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명상에 잠긴 뒤에 무릎을 꿇고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하고 나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가장 높이 계신 분의 시선이 그런 일을 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모든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들을 계속해서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거룩한 눈은 죄인 가운데서도 더 이상 죄인일 수 없는 작은 사람, 이보다 더 자격이 없고 이보다 더 죄인일 수 없는 사람을 찾을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자는 누구라는 것입니까? 언제나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늘 겸손함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는 자라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부족하다 생각된다고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생각이 바로 여러분을 더욱 거룩하게 만들어 갈 줄 믿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는 26절에서 말씀합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무엇을 희생하라는 것입니까? “나를 섬기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있으라”고 하시죠? 한 마디로 무엇입니까? 삶을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나를 섬기라는 것은, 삶의 목적을 말씀하는 것이고, 따르라는 것은, 삶의 방식을, 그리고 나 있는 곳에 있으라는 것은, 삶의 장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이 철저하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간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귀히 여겨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그런 삶 자체가 희생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 26절에 ‘거기’란 어디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까? 이곳은 바로 골고다 십자가 언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눈앞에 바라보시며 이 말씀을 하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처럼 사는 인생이란 어떤 인생이라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16장 24절의 말씀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이 가신 골고다 언덕까지 따라가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쉽습니까? 여러분 그냥 이 힘든 희생을 치를 수 있습니까?

그러나 사도행전 1장 8절은 뭐라고 했습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아까 마태복음 16장 24절이나 본문의 문장형태는 명령형 능동태이지만, 사도행전 1장 8절은 어떤 형태입니까? 수동태입니다. 되라가 아니라,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만 받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어떤 십자가도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틴루터는 믿음과 행함은 마치 뜨거운 난로와 그 위에서 펄펄 끓는 주전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한 것은,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고전15:10)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충만하여 뜨거운 난로가 된다면, 우리의 삶은 어떤 십자가도 능히 지고 가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 삶의 문제는 보다 신앙의 근본적인 것에 있는 것이지, 결코 어떤 일을 하지 못하는 외면적인 환경이나 조건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이나 조건이나 능력을 탓하지 말고, 히브리서 4장 16절의 말씀처럼,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의 삶이 영적으로 메마름을 느낀다면,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 사도가 말했던 것처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진정으로 회개하며 은혜를 구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말로 구원받은 자의 모든 기득권을 다 내려놓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진정으로 회개하는 가운데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만나주실 줄 믿습니다. 또 실패하더라도, 또 시도하면 또 만나주실 줄 믿습니다. 그것이 빌립보서 2장 12절의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무엇을 희생하라고 하십니까? 다같이 27절과 28절 상반절을 읽겠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무엇입니까? 내 마음, 내 뜻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아버지가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해달라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아버지의 영광 때문에 자신의 뜻을 희생시키고, 아버지의 뜻대로 복종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희생은 그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위해 드렸던 사랑의 희생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희생은 직접적으로는 온 인류를 위한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아버지께 드리는 거룩한 희생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어떤 희생을 드려야 하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의 희생은 결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거룩한 희생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를 위해 희생했다고 한 후에 절대로 그로부터 대가를 바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하나님께 희생함으로 우리의 희생이 고귀하고 거룩한 희생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열매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한 곤충학자가 개미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그는 개미들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곳에 나무젓가락을 넣고 그곳에 불을 붙였습니다. 불이 났을 경우 개미들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연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자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불을 끄는 방법을 몰라 당황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개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으로 불을 발견한 개미가 자신의 몸을 불 속으로 내던졌고 다음 개미들도 마찬가지로 불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자 불꽃이 점점 약해졌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개미의 몸을 이루고 있는 키틴질이 불에 타면서 불꽃을 줄이는 소화물질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희생할 때, 그들의 공동체가 살아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글로버라는 사람은, "역사 속의 예수"라는 책에서 기독교인들이 이교도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더 많이 인내했고, 더 생각했고, 더 많이 죽었기 때문"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교회도 누군가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많은 열매를 거두고 있는 줄 믿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도 이처럼 누군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음식으로, 꽃꽂이로, 찬양으로, 물질로, 몸으로, 기도로, 방송으로, 차량으로, 화장실 청소로, 강단으로, 파킹장으로, 여러 가지 봉사와 섬김으로 구석구석에서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많은 열매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 통계를 보니까, 제가 삼년전 부임한 이래로 가장 많은 인원이 와서 예배를 드렸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는 분명 기뻐할 만한 일이라고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은 희생이 이 제단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하나님은 결코 우리 제단의 부흥을 멈추지 않으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제 여러분 가운데 더 많은 헌신자들이 일어난다면, 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신앙이란 매일 새로운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다시 새롭게 결단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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